삼각산 도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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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드시다
통합종단의 초대 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맡은 청담스님은 신생종단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불교 근대화의 발판이란 전제 아래 △역경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세웠다. 부처님 말씀을 널리 알리고(역경),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게 하며(포교), 전법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양질의 스님을 키워내자(도제양성)는 게 밑그림이었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장기적 계획의 실행은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에 이어 1966년 11월 제2대 종정에 청담스님이 추대됐다. 스님은 “임기 5년을 500만 신도의 정화운동에 바치겠다”며 “진아(眞我)만이 과도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체”라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청담스님을 회주로 1967년 5월2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불교도 대표자대회에서 청담스님은 미래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3대 사업을 포함해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촉구, 신도조직 강화,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각 사찰에서 매주 1회 정기법회를 개최할 것과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을 목표로 세웠다. 대회에서 제안된 모든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종단이 결국엔 달성한 과제들이다. 무엇보다 종단 백년대계의 근본에는 청담스님의 지혜와 원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종단의 성장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담스님이 야심 차게 내놓은 종단발전방안은 선구적이고 진취적이었으나 계파 간의 분열로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승풍실추 사건이 터지면서 정화의 가치가 퇴색하는 지경이었다. 이에 청담스님은 ‘탈종’이라는 극약의 처방으로 종도들의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중진 스님들의 거듭된 만류로 종단에 돌아온 청담스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웠다. 매일같이 군법당 준공식, 대학 강연, 신도법회 등 포교현장을 누비며 불교의 진면목을 가르쳤던 청담스님은 1971년 11월15일 원적에 들었다. 2만 여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다비식은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