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풍수도참사상의 비조이자 신라 말 선종산문 옥룡산문의 개조였던 선각국사 도선은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보고 1천년 후 말세에 불법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천명했다고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풍수지리와 도참술의 비조로, 고려왕조를 개창한 태조왕건에게 정신적 이념을 제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이 참다운 고승이라기 보다는 술승 또는 권승으로, 심지어 신화적인 인물인 신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님이 저술하였다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등의 풍수도 참류나 『편년통록』·『용비어천가』·『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 관찬서에도 풍수도참사상이나 태조왕건과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으며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진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