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순호대종사

출생과 불연

청담스님은 구한말이었던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22년 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독서와 사색을 즐겼고 3·1운동 시위에 가담했던 정의로운 소년이었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던 박포명스님과 조우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맺었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라는 스님의 마음법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도 놀라웠던 ‘마음’이란 말”에 힘입어 청담스님은 그 마음을 찾는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출가와 수행

스님의 첫 출가는 일본에서 이뤄졌다. 지피지기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1924년 효고현(兵庫縣) 쇼운지(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질색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석전 박한영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27세에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이었던 서울 개운사 불교전수상원에 입학해 대교과를 수료했다. 이후 마음의 본체를 깨닫기 위해 교(敎)를 버린 스님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두타행으로 일관했다.
최고의 선승으로 각광받던 만공스님 문하에서 공부했다. 기어이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청담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겼다.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上來佛祖鈍痴漢), 어찌 현학(衒學)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安得了知衒邊事)?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若人間我何所能), 길가의 오래된 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路傍古塔傾西方).” 사량분별(思量分別)의 한계를 뚫고 반야지(般若智)를 성취한 대장부의 기개가 느껴진다.

설악산 봉정암에서 정진했을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았다. 스님을 남겨놓고 도반들이 모두 떠나고 마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선정(禪定)에서 빠져 나온 스님은 도반들이 모두 백담사로 떠난 것을 알았다. 그러나 폭설(暴雪)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 청담스님은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잘 됐다”면서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식량도 떨어진 상황에서 보름이 지났다. 당시 홍천군수와 경찰서장의 꿈에 설악산 산신이 나타났다. “지금 봉정암에 도인이 공부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공양을 하라.” 꿈이 일치하는 것이 신기해 두 사람은 봉정암으로 부랴부랴 올라갔다. 피골이 상접한 청담스님을 봤다.

청담스님은 암울했던 시절 민족불교운동에도 앞장섰던 행동하는 수행자였다. 개운사 강원에 재학하면서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했고 항일불교의 선봉으로 부상했다. 이후 비구승이 한국불교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설립한 선학원의 이사를 맡으면서 젊은 수행자들의 기수가 됐다. 불교정화를 총체적으로 기획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정화를 향한 원력은 해방 후 1947년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봉암사 결사는 함께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참선정진하며 부처님 당시의 승가를 재현한 수행공동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수행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면서 오늘날 종단 제도의 모태를 만들었다. 청담스님은 성철 향곡 자운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결사에 매진하며 한국불교의 희망을 싹 틔웠다.

불교정화운동

불교정화운동을 빼고 청담스님의 행장을 말할 수 없다. 당신은 정화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한일병탄 이후 한국불교는 일제가 저지른 사찰령과 대처승 제도로 쑥대밭이 됐다. 자주성을 잃었고 청정성이 무너졌다. 불교정화운동은 청담스님을 비롯한 진보 진영 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미 일제강점기에 싹을 틔웠다. 그러나 교단을 장악한 대처승의 장벽에 막혀 돌파구를 좀처럼 찾지 못하던 중 “대처승은 사찰에서 나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기폭제가 됐다.

1954년 9월 전국비구승대회를 마친 뒤 비구승들은 임시종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종회의원을 뽑고 간부진을 꾸렸다. 청담스님은 도총섭과 총무원장을 연이어 맡으며 정화운동을 총지휘했다.
그해 11월 대처승과의 실랑이 끝에 조계사로 들어가 ‘태고사’ 간판을 내리고 선(禪) 수행 종단임을 표방하는 ‘조계사’ 간판을 내걸었다. 이어 청담스님은 조계사 법당에서 교단정화 대강연회를 개최해

정화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1962년 4월 통합종단이 출범하기까지 소송전과 물리적 충돌의 방식으로 전개된 정화운동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중심을 지키고 비구승의 전의를 일깨워준 것은 청담스님이었다.

“청담스님의 정화활동은 실로 전방위적이었다. 간부 스님들을 대동하고 거의 매일같이 내무부 치안국(당시 명동입구)에 들렀다가 문교부(당시 중앙청, 현 광화문 자리)로, 때로는 경무대와 언론기관을 방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교단정화 불사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

가장 큰 고비는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의 정통성을 부정한 판결이었다. 청담스님은 패소를 예견하고 비밀리에 순교단을 꾸렸다. 이른바 ‘6비구’는 판결일 다음날 대법원 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결행은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청담스님은 “불교정화는 단순히 비구와 대처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했다. 마침내 대처승은 원칙적으로 스님이 아니라는 종헌 개정과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한 통합종단의 출범을 성취할 수 있었다.
제22대 총무원장을 지낸 서운스님은 “승려대회와 6비구 할복사건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청담스님이 기획하고 지휘했다”며 “스님의 의지와 기백이 아니었다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결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불교신문의 창간 역시 정화이념의 실현을 위한 방편이었다. 1960년 1월1일 청담스님에 의해 정화이념 홍보를 위한 기관지로 탄생한 불교신문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언론으로 성장했다. 총무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은 창간사에서 “종단의 발전상 필요한 과제를 비롯하여 평론, 교리, 문예 그리고 종보, 교계소식 등 다방면의 원고를 취급할 계획”이라며 “우리들의 기관지인 만큼 각자가 자기 것이라는 관념 하에” 아끼고 육성할 것을 당부했다.

열반에 드시다

통합종단의 초대 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맡은 청담스님은 신생종단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불교 근대화의 발판이란 전제 아래 △역경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세웠다. 부처님 말씀을 널리 알리고(역경),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게 하며(포교), 전법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양질의 스님을 키워내자(도제양성)는 게 밑그림이었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장기적 계획의 실행은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에 이어 1966년 11월 제2대 종정에 청담스님이 추대됐다. 스님은 “임기 5년을 500만 신도의 정화운동에 바치겠다”며 “진아(眞我)만이 과도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체”라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청담스님을 회주로 1967년 5월2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불교도 대표자대회에서 청담스님은 미래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3대 사업을 포함해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촉구, 신도조직 강화,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각 사찰에서 매주 1회 정기법회를 개최할 것과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을 목표로 세웠다. 대회에서 제안된 모든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종단이 결국엔 달성한 과제들이다. 무엇보다 종단 백년대계의 근본에는 청담스님의 지혜와 원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종단의 성장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담스님이 야심 차게 내놓은 종단발전방안은 선구적이고 진취적이었으나 계파 간의 분열로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승풍실추 사건이 터지면서 정화의 가치가 퇴색하는 지경이었다. 이에 청담스님은 ‘탈종’이라는 극약의 처방으로 종도들의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중진 스님들의 거듭된 만류로 종단에 돌아온 청담스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웠다. 매일같이 군법당 준공식, 대학 강연, 신도법회 등 포교현장을 누비며 불교의 진면목을 가르쳤던 청담스님은 1971년 11월15일 원적에 들었다. 2만 여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다비식은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마음사상

“이 마음, 생명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마음은 곧 우주의 핵심이며, 만물의 생명인 것이다.” 청담스님의 설법은 마음으로 귀결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원효스님의 일심(一心) 사상을 재구성했다. 마음을 기반으로 한 세계의 원리를 파악하면, 쓸데없는 마음으로 집착하거나 차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 인생이며, 문자 그대로 신비이며 무사의(無邪疑)한 이 생명을, 이 마음을, 이 나를 바로만 깨닫고 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조리 해결된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 인생이며, 문자 그대로 신비이며 무사의(無邪疑)한 이 생명을, 이 마음을, 이 나를 바로만 깨닫고 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조리 해결된다.… 나는 영원하며 자유로우며 평등하다.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완전하다.” <청담대종사전서>

청담스님은 마음의 이치를 밝히기 위해 출가했다. 그리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마음을 마침내 얻었다. 스님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편재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참나’를 지향했다.
‘참나’란 감각과 개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통찰과 전체로서의 나를 성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을 일컫는다. 불교정화의 궁극적 목표 역시 국민 개인의 마음을 맑히는 사회정화였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청정하게 밝지 못하면 만사를 원망과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미신이 생기는 법이다. 내 마음에 때가 있으면 남도 때가 있어 보이고, 내 마음이 깨끗하면 남도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밝혀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

보관광복대종사

광복스님은 30년전 입적하신 청담대종사를 은사로 출가.
도선사에서 청담대종사를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봉암사 등 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 했다.

이후 11∼12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낸 뒤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이사와 도선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선묵혜자대종사

법명 혜자(慧慈), 법호 선묵(禪默). 스님은 14세 때 청담(靑潭, 1902∼1971) 대종사님을 은사로 모시고 삼각산 도선사에서 출가하여 통도사 강원에서 경학연찬, 송광사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했으며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거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조계종 소청심사위원장, 북부경찰서 경승실장, 동국대 불교대학원 출가공 동체모임 동림회 회장과 도선사 주지 등을 역임 했으며, 현재 청담학원 이사장, 혜명복지원 이사장, 풍경소리 대표, 불교환경연대회의 공동대표,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사, 불교신문사 사장, (사)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 도안사 주지 등 주요 소임을 맡고 있다.

송산도서대종사

법명 도서(道瑞), 법호 송산(松山).

도서스님은 1980년 혜성대종사를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계했다. 이후 통도사승가대학 졸업하고, 호국지장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하와이 무량사 태평선원에서 안거 수행했다. 현재는 삼각산 도선사 주지를 맡고 있다.